매우 유명한, 지금은 고인이 된
세기의 천재, 아이폰의 아버지, 애플의 창업주이자 CEO 였던 스티브 잡스의 스텐포드대학 졸업식 연설입니다.
유명한 동영상과 글이니 만큼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한번은 정독해 보시길 바랍니다.
Unit 15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by Steve Jobs
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Truth be told,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세계 최고의 대학 중 하나의 졸업식에서 여러분과 함께하게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번이 대학 졸업식과 가장 가까운 날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께 제 인생에서의 세 가지 이야기를 해드리려고 합니다. 그것뿐입니다. 거창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이야기 셋뿐입니다.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So why did I drop out?
첫 번째 이야기는 결론을 도출해 내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저는 리드 대학을 6개월 동안 다니다가 중퇴했습니다만, 그 후에도 정말 그만 두기 전까지 약 18개월간 가짜 학생으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중퇴를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We've got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They said: "Of course." My biological mother found out later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go to college. This was the start in my life.
그 이유는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됩니다. 저의 생물학적 어머니는 매우 젊은 미혼의 대학원생이었고 그녀는 저를 입양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대학을 졸업한 사람에게 입양 돼야 한다고 느꼈고, 따라서 저는 변호사와 그의 아내에게 입양되기 위해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었습니다. 제가 태어나고 변호사 부부가 정말 원했던 것은 딸이라고 결심했을 때를 제외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대기 목록에 올라있던 저희 부모님은 한 밤 중에 이렇게 묻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예상치 않게 남자아이가 태어났는데요, 이 아이를 원하십니까?" 그분들은 "물론입니다."라고 답하셨습니다. 저의 생물학적 모친은 후에서야 저의 어머니가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고 아버지께서는 고등학교 졸업을 못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최종 입양 서류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셨습니다. 몇 개월 후에 저희 부모님께서 제가 언젠가는 대학을 가게 될 거라고 약속하신 후에야 겨우 누그러지셨습니다.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far more interesting.
그리고 17년 후에 저는 대학에 갔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선택한 대학은 거의 스탠포드만큼이나 비쌌고, 노동 계급의 부모님께서 저금하신 돈은 저의 대학 수업료로 전부 사용되었습니다. 6개월 후에, 저는 그 속에서 가치를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저는 제 삶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대학이 그것을 알아내는데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중퇴하기로 결심하고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때 당시에는 꽤나 두려웠지만 돌아보면 제가 한 잘한 선택 중 하나였습니다. 중퇴를 하자마자 저는 필요하지만 관심이 없었던 수업을 그만 두고 흥미로워 보이는 일들을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deposits to buy food with,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Let me give you one example: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항상 낭만적이었던 것만은 아닙니다. 기숙사 방이 없었기 때문에 친구들 방의 바닥에서 잠을 자고, 음식을 살 5 센트를 위해 콜라병을 회수했으며, 하레 크리슈나 사원에서 제공하는 식사를 위해 매주 일요일마다 마을을 가로질러서 7마일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호기심과 직관을 따라 만나게 된 것은 후에 아주 귀중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리드 대학에서는 그 때 당시 최초로 서예 강습을 제공했습니다. 모든 포스터와 모든 서랍의 꼬리표에도 아름답게 글씨가 쓰여 있었습니다. 중퇴를 해서 보통의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저는 서법 교실을 듣기로 결정했습니다. 저는 세리프에 대해 배우고, 산세리프체에 대해 배우고 무엇이 서체를 훌륭하게 하는지 배웠습니다. 이것은 과학은 매료시킬 수 없는 방식으로 아름답고, 역사적이고 예술적으로 섬세했고 저는 이것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Because believing that the dots would connect down the road will give you the confidence to follow your heart even when it leads you off the well-worn path. And that will make all the difference.
이것들 중 아무것도 제 삶에서 유용할 거라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리나 십 년 후에, 저희가 최초의 매킨토시 컴퓨터를 설계할 때 전부 저에게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이것들을 전부 매킨토시 안에 디자인했습니다. 매킨토시는 아름다운 서체를 가지게 된 최초의 컴퓨터였습니다. 제가 중퇴하여 대학에서 그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매킨토시는 다양한 서체나 비례하여 공간이 주어진 활자를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매킨토시를 따라한 윈도우즈에도 그런 기능이 없었을 것이고 개인용 컴퓨터에는 이런 기능이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중퇴를 하지 않았다면 저는 서체 수업을 듣지 않았을 것이고 개인 컴퓨터는 현재처럼 훌륭한 서체를 가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대학에 있었을 때는 미래의 일로 연결시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십 년 후에 회상한 것은 매우, 매우 분명했습니다. 또, 여러분은 앞을 내다보며 결론을 내릴 수 없습니다. 오직 뒤를 돌아보며 결론을 내릴 수만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이 사실이 어떻게든 앞날과 연결될 것이라고 믿어야합니다. 끈기, 운명, 생명, 업보, 무엇이든 믿어야 합니다. 이 접근법은 저를 실망시킨 적이 없으며 제 인생에서의 모든 차이를 만들어 냈습니다.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I was lucky —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제 두 번째 이야기는 사랑과 상실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운이 좋았습니다. 살면서 하고 싶은 일은 일찍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워즈와 저는 20살 때 저희 부모님의 차고에서 애플을 시작했습니다. 저희는 열심히 일했고 10년 만에 애플사는 차고 속의 두 명에서 4000명 이상의 직원을 가진 20억 달러 매출의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저희는 그 때 최고의 수작, 매킨토시를 1년 전 출시했고 저는 막 30을 넘겼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는 해고되었습니다. 자신이 시작한 회사에서 어떻게 해고될 수 있을까요? 말하자면, 애플사가 성장할 때 저희는 저와 회사를 경영할만한 충분한 자질이 있다고 고려되는 사람을 고용했고 처음 1년간은 모든 것이 순조로웠습니다. 그러나 저희의 미래에 대한 관점이 갈리기 시작했고 결국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사이가 그렇게 되자 이사회는 그를 지지했습니다. 그래서 30에 저는 회사를 나왔습니다. 그리고 매우 공식적으로 해고되었습니다. 성인의 삶 전체의 중심이 되어오던 것이 사라졌고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저는 몇 달간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저는 마치 제가 기업가의 세대를 내려놓은 것처럼, 저를 지나치고 있는 배턴을 놓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는 데이비드 패커드와 밥 노이스를 만나서 일을 망쳐버린 것에 대해 사과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저는 매우 공공연한 실패자였고 고난의 시기로부터 도망치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무언가가 제 안에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아직 제가 하는 일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애플에서의 사건은 아주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버려졌지만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그 때는 알지 못했지만, 애플사에서 해고된 것은 저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고의 일이었습니다. 성공의 부담감은 모든 것에 대해 덜 확실한 초심자의 가벼움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인생의 가장 창의적인 시기에 들어설 수 있게 했습니다.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 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r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그 후 5년 동안 저는 NeXT라는 이름의 회사와 Pixar라는 회사를 시작했고 제 아내가 되는 놀라운 여인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픽사는 세계 최초의 컴퓨터로 제작된 영화 '토이 스토리'를 만들어나갔고 이것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되었습니다. 주목할 만한 사건의 연속들 속에서 애플사는 NeXT를 인수했고 저는 애플사로 돌아갔으며 저희가 NeXT에서 개발한 기술들은 애플사의 르네상스의 중심에 있습니다.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Sometimes lifes can hit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And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So keep looking. Don't settle.
저는 애플사에서 해고되지 않았다면 이런 일들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입에 쓴 약도 환자에게는 필요한 법이지요. 가끔씩 인생에서 여러분은 난관에 부딪힐 것입니다.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저는 제가 앞으로 계속 나가게 한 유일한 것은 제가 좋아하는 일이었다고 확신합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것을 찾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일에 대한 것도 여러분의 연인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일은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할 것이고 진실 되게 만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여러분의 훌륭한 일이라고 믿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훌륭한 일은 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아직 찾지 못했다면, 계속해서 찾으십시오. 안주하지 마십시오. 마음속의 문제들이 있기 때문에, 언제 찾을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느 관계들처럼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좋아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발견할 때까지 계속해서 찾으십시오. 안주하지 마십시오.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제 세 번째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17살 때 이런 인용문을 읽었습니다. "만일 매일을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산다면 언젠가 당신의 인생이 분명히 옳은 삶이 될 것이다." 이 글은 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그때부터 지난 33년 동안 저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만일 오늘이 내 삶의 마지막 날이라면 오늘 내가 하려는 일을 하고 싶을 것인가?" 그리고 대답이 "아니요"라고 연속으로 이어지자 저는 무언가를 바꿀 필요가 있음을 느꼈습니다.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Because almost everything —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f failure -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내가 곧 죽을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인생에 있어 큰 선택을 하게 도와준 가장 효과적인 도구였습니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외부의 기대와 모든 자존심, 궁핍함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것들은 죽음과 직면하면 진정으로 중요한 것만을 남기고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곧 죽을 것을 기억하는 것은 제가 아는 한 잃는 것에 대한 생각의 덫에 빠지는 것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전부 드러났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따르지 않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It means to try and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일 년 전에 저는 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오전 7시 30분에 정밀 검사를 하고 췌장에 뚜렷하게 종양이 보였습니다. 저는 췌장이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의사들은 이 종양이 거의 치료가 불가능한 유형이 거의 확실하다고 말했고 길어봤자 3개월에서 6개월을 살 수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주치의들은 집에 가서 신변 문제를 완전히 정리해 두라고 충고했고 이것은 죽음에 대비하라는 의사의 신호였습니다. 이 말은 아이들에게 이후 10년 동안 해주려고 했던 말은 단 몇 달 안에 하라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모든 것이 잘 마무리 돼서 가능한 한 가족을 편하게 만들어주라는 의미였습니다. 작별인사를 하라는 말이었습니다.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I had the surgery and thankfully I'm fine now.
저는 하루 종일 그 진단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저녁 늦게 저는 생검을 받았고 목구멍을 통해 내시경을 집어넣어서 위를 통해 장에 넣고 췌장에 바늘을 집어넣어 종양에서 약간의 세포를 떼어냈습니다. 저는 차분했지만 그곳에 있던 제 아내는 의사들이 현미경으로 세포를 살피고는 의사들이 울기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수술로 치료할 수 있는 췌장암의 매우 희귀한 형태로 밝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수술을 받았고 이제는 완쾌되었습니다. 이것이 죽음과의 직면과 가장 가까웠던 때였고 앞으로 몇 년간 그럴 것을 바랍니다. 이런 경험을 겪고 살면서 여러분께 죽음이 단지 유용하지만 순수하게 지적 개념이었을 때보다 약간 더 확실하게 이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아무도 죽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천국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조차 그곳에 가기 위해 죽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죽음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목적지입니다. 아무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죽음은 인생의 최고의 발명품이라 할 만하기 때문에 그래야만 합니다. 죽음은 인생을 변하게 합니다. 새로운 것을 위해 길을 내어주기 위해서 오래된 것을 정리합니다. 현재 새로움은 여러분들이지만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언젠가는 여러분이 점차 오래된 것이 되어 정리될 것입니다. 너무 극적인 이야기가 되어 죄송하지만 이는 사실입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여러분의 시간은 한정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누군가의 삶을 살기 위해 이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교리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이것은 다른 이의 생각의 결과와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의 잡음이 스스로의 내부에서 나온 목소리를 압도하게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마음과 직관을 따를 용기를 가지십시오. 다른 모든 것은 2차적인 것입니다.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제가 어렸을 때, '지구 백과'라는 놀라운 책이 있었습니다. 저희 세대의 바이블 중 하나였습니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먼로 파크의 스튜어트 브랜드라는 사람 의해 만들어졌고 그는 시적인 감동으로 이 책을 삶으로 가져왔습니다. 이때는 개인 컴퓨터나 탁상 출반 이전의 1960년대였고, 따라서 모든 것은 타자기와 가위, 그리고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만들어졌습니다. 구글이 잘 되기 35년 전의 종이로 만들어진 구글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이상적이고 새로운 수단들과 개념들로 가득했습니다.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the kinds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Stay Hungry. Stay Foolish. Thank you all very much.
스튜어트와 그의 팀은 몇 번 개정판을 내놓았고 최종판을 내놓은 1970년대 중반에 저는 여러분의 나이 또래였습니다. 마지막 주제의 뒤표지에는 약간 모험적이라면 히치하이킹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이른 아침의 시골길의 사진이 실려 있었습니다. 이 밑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갈망하라, 우직하게." 이것이 그들이 끝을 맺으면서 남긴 작별의 인사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졸업을 하는 여러분들에게 이것을 바랍니다.
우직하게, 갈망하십시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