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it 9 "The children's Era"

미국 사회개혁가 생어(Margaret Sanger)의 글입니다.

생어는 1883년 미국 뉴욕 코닝에서 태어났으며 미국 산아제한운동의 창설자이며 이 분야의 국제적인 지도자 였습니다. 간호원으로 근무하는 동안 그곳에서 빈곤, 무제한적인 출산, 유아와 산모의 높은 사망률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모든 여성에게는 가족 계획의 권리가 있다고 믿고 피임에 관한 사실들을 공개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적인 장애물을 제거하는 일에 자신을 바쳤습니다.

 

 생어에 대해 알아보던 중 재밌는 내용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926년 11월 연방법원 항소심은 피임에 관한 문헌과 기구를 음란물로 규정했던 1873녀의 콤스톡 법을 해석하여"환자의 생명을 구하거나 복지를 증진할 목적으로"의사들이 피임약을 처방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라는데 놀랍습니다. 불과 90년 전만해도 이러한 상황 이었다니요.

 

여튼, 1921년 미국산아제한연맹을 창설하고 28년까지 회장으로 지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읽으신다면 좀 더 이해가 쉬울 듯 합니다.

 

 

 

Unit 9 "The children's Era"

 

My subject is "The children's Era." The Children's Era! This makes me think of Ellen Key's book-The Century of the child. Ellen Key hoped that this twentieth century was to be the century of the child. The twentieth century, she said, would see this old world of ours converted into a beautiful garden of children. Well, we have already lived through a quarter of this twentieth century. What steps have we taken toward making it the century of the child? So far, very, very few. Why does the Children's Era still remain a dream of the dim and the distant future? Why has so little been accomplished? -in spite of all our acknowledged love of children, all our generosity, all our good-will, all the enormous spending of millions on philanthropy and charities, all our warmhearted sentiment, all our incessant activity and social consciousness? Why?

 

내 글의 주제는 "아이들의 시대"이다. 아이들의 시대! 이 말은 엘렌 케이의 책, 어린이의 세기를 떠올리게 한다. 엘렌 케이는 20 세기가 어린이들이 세기가 되기를 희망했다. 그녀가 말하길, 20세기는 우리들의 오래된 세상을 보고 아름다운 어린이들의 정원으로 바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20세기의 1/4를 살아왔다. 어린이의 세기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취한 조치는 무엇이 있는가? 지금까지, 매우, 매우, 드물다. 어린이의 시대는 왜 아직까지 희미한, 먼 미래의 꿈으로 남아있을까? 왜 정평이 나있는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관대함, 모든 온정과 막대한 박애와 자선, 다정함과 끊임없는 활동과 사회의식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것은 극히 드문 것은 어째서일까? ?

 

Before you can cultivate a garden, you must know something about gardening. You have got to give your seeds a proper soil in which to grow. You have got to give them sunlight and fresh air. You have got to give them space and the opportunity (if they are to lift their flowers to the sun), to strike their roots deep into that soil. And always-do not forget this-you have got to fight weeds. You cannot have a garden, if you let weeds overrun it. So, if we want to make this world a garden for children, we must first of all learn the lesson of the gardener.

 

정원을 가꾸기 전에는 반드시 조원에 대해 알아야 한다. 당신은 씨앗이 자랄 곳에 충분한 흙을 주어야 한다. 그리고 햇빛과 신선한 공기를 주어야 한다. 그들에게 공간을 주고 기회를 주어야(만일 태양을 향해 꽃을 피우려고 한다면)하며, 뿌리가 땅 속 깊숙이 내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잡초와 싸워야 한다는 것을 항상 잊어서는 안 된다. 잡초가 우거지도록 내버려 둔다면, 결코 정원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이 세상을 어린이들의 정원으로 만들고 싶다면 첫째로 정원사의 교훈을 배워야 한다.

 

So far we have not been gardeners. We have only been a sort of silly reception committee, a reception committee at the Grand Central Station of life. Trainload after trainload of children are coming in, day and night-nameless refugees arriving out of the Nowhere into the Here. Trainload after trainload-many unwelcome, unwanted, unprepared for, unknown, without baggage, without passports, most of them without pedigrees. These unlimited hordes of refugees arrive in such numbers that the reception committee is thrown into a panic-a panic of activity. The reception committee arouses itself heroically, establishes emergency measures: milk stations, maternity centers, settlement houses, playgrounds, orphanages, welfare leagues, and every conceivable kind of charitable effort. But still trainloads of children keep on coming-human weed crop up that spread so fast in this sinister struggle for existence, that the overworked committee becomes exhausted, inefficient, and can think of no way out.

 

지금까지 우리는 정원사였던 적이 없었다. 우리는 단지 어리석은 접대원, 인생의 그랜드 센트럴 역의 접대원이었을 뿐이다. 어린이들의 열차가 밤낮으로 꼬리를 물고 들어온다. 이름 없는 피난 자들이 어디선가 도착해온다. 열차가 꼬리를 물고 많은 이들이 환영받지 못하는, 요구되지 않은, 준비되지 않은, 알려지지 않은, 수하물 없는, 여권이 없는, 혈통 없는 이들이다. 이 끝없는 수많은 피난 자들의 무리가 도착하여 접수원은 행동의 공황상태에 빠진다. 접수원은 자신을 영웅적으로 각성하게하며, 비상 대책들-모유 수유소, 임부 상담소, 사회 복지관, 운동장, 고아원, 복지 연맹, 그리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자선 운동-을 수립한다. 그러나 어린이들의 열차가 계속해서 들어오면서 생존에 대한 불길한 투쟁 속에서 너무나 빠르게 퍼져나가는 인간 잡초들이 생겨나고 무리한 접수원들이 지치고, 무능해지면서 해결책을 생각할 수 없게 된다.

 

When we protest against this immeasurable, meaningless waste of motherhood and child-life; when we protest against the ever-mounting cost to the world of asylums, prisons, homes for the feeble-minded, and such institutions for the unfit, when we protest against the disorder and chaos and tragedy of modern life, when we point out the biological corruption that is destroying the very heart of American life, we are told that we are making merely an "emotional" appeal. When we point the one immediate practical way toward order and beauty in society, the only way to lay the foundations of a society composed of happy children, happy women, and happy men, they call this idea indecent and immoral.

 

우리가 이렇게 측정불가능하고, 의미없는 모성애와 아이들의 삶이라는 쓰레기와 같은 것에 반대해서 항의할 때, 보호소, 감옥, 정신박약자를 위한 주택, 사회부적응자를 위한 시설에 대한 세상의 비용을 상승시키는 것을 항의할 때, 무질서, 혼란, 현대생활의 비극에 대해 항의할 때, 미국인의 삶의 핵심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생물학적 붕괴를 지적할 때, 우리는 단지 감정적인호소를 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행복한 아이들, 행복한 여자들, 행복한 남자들로 구성되어진 사회의 근간을 놓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사회내의 질서와 아름다움으로 향하는 한 가지 즉각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지적할 때, 그들은 이 생각을 바람직하지 않고 부도덕하다고 부른다.

 

It is not enough to clean up the filth and disorder of our overcrowded cities. It is not enough to stop the evil of Child Labor - even if we could! It is not enough to decrease the rate of infantile mortality. It is not enough to open playgrounds, and build more public schools in which we can standardize the mind of the young. It is not enough to throw millions upon millions of dollars into charities and philanthropies. Don't deceive ourselves that by so doing we are making the world "Safe for Children."

 

사람들로 가득찬 도시의 오물과 무질서를 깨끗이 치워버리는 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미성년 노동이라는 악행을 막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하더라도 말이다. 유아사망율을 줄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놀이터를 열어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젊은이들의 마음을 우리가 규격화할 수 있는 보다 더 많은 공립학교를 세워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자선과 박애라는 것에 수백만달러를 퍼붓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세계를 아이들을 위해 안전한 곳으로 만들고 있다고 우리자신을 속이지 맙시다.

 

Those of you who have followed the sessions of this Conference must, I am sure, agree with me that the first real stop toward the creation of a Children's Era must lie in providing the conditions of healthy life for children not only before birth but even more imperatively before conception. Human society must protect its children - yes, but prenatal care is most essential! The child-to-be, as yet not called into being, has rights no less imperative.

 

이번 회의의 분야를 따랐던 여러분들은 제가 확신하건데, 아이들의 시대의 창조를 향한 최초의 진짜 정거장이란 것은 아이들을 위한 건강한 삶의 조건을 제공하는데 있다는 사실에 동의해야 한다. 그것은 태어나기 이전 뿐만 아니라 임신이전에 보다 더 명령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사회는 그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 그렇다. 그렇지만 출생이전의 보살핌은 더욱더 필수적이다. 아직 존재라고 불리는 것이 아닌 아이가 된다는 것은 명령과도 같은 권리를 가진다.

 

We have learned in the preceding sessions of this Conference that, if we wish to produce strong and sturdy children, the embryo must grow in a chemically healthy medium. The blood stream of the mother must be chemically normal. Worry, strain, shock, unhappiness, enforced maternity, may all poison the blood of the enslaved mother. This chemically poisoned blood may produce a defective baby - a child foredoomed to idiocy, or feeble-mindedness, crime, or failure.

 

이번회의의 앞선 분야에서 우리가 강하고 튼튼한 아이를 생산해 내려고 한다면 태아는 화학적으로 건강한 조건 내에서 자라야만 한다는 것을 배웠다. 어머니의 혈관은 반드시 화학적으로 정상이어야 한다. 걱정, 긴장, 충격, 불행, 강요된 모성은 노예상태가 된 어머니의 피에 독이 된다. 이런 화학적으로 독이 된 혈액은 바보, 정신박약아, 범죄자, 실패자로 미리 운명지어진 기형아를 만들 것이다.

 

Do I exaggerate? Am I taking a rare exception and making it a general rule? Our opponents declare that children are conceived in love, and that every new-born baby converts its parents to love and unselfishness. My answer is to point to the asylums, the hospitals, the ever-growing institutions for the unfit. Look into the family history of those who are feeble-minded; or behind the bars of jails and prisons. Trace the family histories; find out the conditions under which they were conceived and born, before you attempt to persuade us that reckless breeding has nothing to do with these grave questions.

 

제가 과장했나요? 제가 정말 극히 드문 예외를 들어 일반적인 규칙으로 만들었나요? 우리입장의 반대자들은 아이들은 사랑으로 수태되어진다고 하며, 모든 신생아는 부모님을 사랑과 이타심을 가진 사람으로 바꾼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의 대답은 보호소, 병원, 사회부적응자를 위한 급속적으로 생겨나는 기관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정신 박약자 혹은 감방과 감옥소에 투옥된 사람들의 가족사를 유심히 살펴보세요. 가족사를 추적해 보세요. 무모한 양육이 이러한 중대한 문제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당신들이 우리를 설득하기 전에, 그들이 수태되고 태어나게 된 조건들을 찾아보십시오.

 

There is only one way out. We have got to fight for the health and happiness of the Unborn Child. And to do that in a practical, tangible way, we have got to free women from enforced, enslaved maternity. There can be no hope for the future of civilization, no certainty of racial salvation, until every woman can decide for herself whether she will or will not become a mother, and when and how many children she cares to bring into the world. That is the first step.

 

한 가지 해결책 밖에 없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우리는 싸워야한다.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방식에서 그것을 하기 위해, 우리는 강압적이고 노예적인 모성애로부터 여성들을 자유롭게 해줘야한다. 모든 여자들이 그녀 자신을 위해 그녀 스스로 그녀가 어머니가 될 것인지 말 것인지, 그리고 언제 그리고 얼마나 많은 아이들을 출산할지에 대해 결정할 수 있기 전까지는, 문명화의 미래에는 어떤 희망도 없고, 인종적 구원의 필연성도 없다. 이것이 첫 번째 단계이다.

 

I would like to suggest Civil Service examinations for parenthood! Prospective parents after such an examination would be given a parenthood license, proving that they are physically and mentally fit to be the fathers and mothers of the next generation. This is an interesting idea - but then arises the questions "Who is to decide?" "Would there be a jury, like a play jury?" Would a Republican administration give parenthood permits only to Republicans - or perhaps only to Democrats? The more you think of governmental interference, the less it works out. Take this plan of civil service examination for parenthood. It suggests Prohibition: there might even be bootlegging in babies!

 

저는 어버이라는 자격에 대해 공공적인 검사를 제의하고 싶다. 그러한 시험을 거친 장래의 부모님들은 부모가 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고, 그것은 향후 세대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는데 그들이 신체적, 정신적으로 적합하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이것은 흥미로운 자료다. 그러나 의문점을 야기한다. ‘누가 결정할 것인가’ ‘배심원이 있나요?’ 공화당 위원회는 공화당원에게만 부모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민주당원에게만 주는 걸까요? 정부의 간섭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할수록 더욱더 안 될 것이다. 부모의 자격에 대한 공공 시험에 대해 계획을 짜 보시오. 그것은 금지를 의미한다. 아이들에 대해 밀매도 있을 수 있다.

No, I doubt the advisability of governmental sanction. The problem of binging children into the world ought to be decided by those most seriously involved - those who run the greatest risks; in the last analysis - by the mother and the child. If there is going to be any Civil Service examination, let it be conducted by the Unborn Child, the Child-to-be.

 

아니다. 정부의 인가가 가진 타당성에 대해 나는 의심한다. 아이를 출산하는 문제는 가장 진지하게 연관된 사람들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한다. 최종적인 분석에서 가장 큰 위험을 무릅쓴 사람들, 어머니와 아이라고 하는 말이다. 또 다른 어떠한 공공시험이 있어야 한다면, 태아라는 아이가 되려는 아이에 의해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자.

 

Just try for a moment to picture the possibilities of such an examination. When you want a cook or housemaid, you go to an employment bureau. You have to answer questions. You have to exchange references. You have to persuade the talented cook that you conduct a proper well-run household. Children ought to have at least the same privilege as cooks.

 

그러한 시험의 가능성을 잠시동안 설명해 보십시오. 요리사나 가정부를 원할 때, 여러분은 고용청에 갑니다.

질문에 답을 해야 합니다. 서로 알 수 있는 참고서를 교환해야 합니다. 당신이 적절한 제대로 돌아가는 가정일을 하고 있다고 재능있는 요리사를 설득해야한다. 아이들은 적어도 요리사와 같은 동일한 특권을 가져야 한다.

 

Sometimes in idle moments I like to think it would be a very good scheme to have a bureau of the Child-to-be. At such a bureau of the unborn, the wise child might be able to find out a few things about its father - and its mother. Just think for a moment of this bureau where prospective parents might apply for a baby. Think of the questions they would be asked by the agent of the unborn or by the baby itself.

 

때때로 한가로울 때 아이가 되려는 사람을 위한 관청을 가지는 것이 매우 좋은 계획이라고 저는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태아를 위한 관청처럼 현명한 아이들은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몇 가지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장래의 부모님들이 아이를 얻겠다고 신청하는 이 관청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태아의 요원 또는 아기 그 자체에 의해서 질문 받고 있는 그 질문을 생각해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