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it 17. Tranformation of the wolf man
from the tibetan Buddhist tradition comes the following story:
늑대 인간의 변화 티베트의 불교 전통에서 다음의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Shalipa was a low-caste woodcutter who lived near the charnel ground of Bighapur. Packs of wolves came by night to eat the corpses (in a charnel ground, corpses are simply deposited on the ground to decay or be eaten by wild animals). The wolves howled all night long, and Shalipa became more and more afraid of them until he could neither eat by day nor sleep by night for fear of the howling of wolves. One evening a wandering yogin stopped by his cottage asking for food. Shalipa gave him food and drink, and, well pleased, the yogin repaid him with a discourse on the virtues of fearing samsara (conditioned existence) and practicing the dharma.
shalipa는 bighapur의 납골당 근처에 살던 낮은 카스트의 나무꾼 이었다. 늑대무리들은 시체를 먹기 위해서 밤마다 찾아왔다. (납골당에서는 시체들이 썩거나 야생 동물들에게 먹히도록 그냥 놓아두었다.) 늑대들은 밤새도록 울부짖었으며 shalipa는 너무나도 두려워져서 먹거나 잠들 수도 없었다. 어느 날 저녁, 방랑하는 요가 수도자가 음식을 얻으려 그의 작은 집에 들렀다. shalipa는 그에게 음식과 마실 것을 주었고, 수도자는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보답으로 윤회와 계율을 실행하는데 대한 두려움의 미덕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다.
Shalipa thanked him but said, 'Everyone fears samsara. But I have a specific fear. Wolves come to the charnel ground and howl all night, and I am so afraid of them that I can neither eat nor sleep nor practice the dharma. Please can't you give me a spell so that I can stop the howling of the wolves?' The yogin laughed and said, 'Foolish man. What good will it do you to eat the food of greed when you do not know what food is? What good will it do you to sleep the corpse-like sleep of ignorance when you do not know what rest is? What good will it do you to destroy the howling of the wolves with the spells or anger when you do not know what hearing or any other sense is? If you will follow my instructions, I will teach you to destroy all fear.'
sahlipa는 그에게 감사했지만 이렇게 말했다. '모든 이들은 윤회를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저는 특별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늑대들이 항상 납골당으로 내려와 밤새도록 울부짖고, 저는 그 소리가 너무나도 두려워서 먹을 수도, 잠잘 수도, 계율을 실천할 수조차 없게 됩니다. 부디 제게 늑대울음 소리를 멈출 수 있는 주문을 가르쳐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수도자는 웃으며 답했다. '어리석은 이여, 음식에 대해 알지 못하고 탐욕스럽게 먹기만 하면 무엇이 좋겠습니까? 휴식을 알지 못하고 송장처럼 무지하게 잠만 잔다면 무엇이 좋겠습니까? 듣는 것을, 혹은 다른 감각을 알지 못하고 분노나 주문으로 늑대 울음소리를 파괴한다면 무엇이 좋겠습니까? 만일 저의 지시를 따르시겠다면 모든 두려움을 없애는 것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Shalipa accepted the yogin as his teacher, gave him all that he had, and begged him for instruction. After giving him initiation, the yogin told him to move into the charnel ground with the wolves and to mediate ceaselessly upon all soundas identical to the howling of wolves. Shalipa obeyed him. Gradually he came to understand the nature of all sound and of all reality. He meditated for nine years, overcame all obscurations of his mind and body, lost all fear, and attained great realization. Thereafter, he wore a wolf skin around his shoulders and was know as the nature of appearances and reality. He taught the unity of appearance, emptiness, wisdom, and skillful means. Finally, in that very body, he went to the realm of the Heroes.
Shalipa는 수도자를 스승으로 받아들이고 전 재산을 내놓으며 가르침을 부탁했다. 그를 입문시킨 후에 수도자는 납골당에 이사를 와서 늑대와 함께 늑대 소리 속에서 끊임없이 명상을 하라고 말했다. shalipa는 그의 말에 따랐다. 점차 그는 모든 현실과 소리의 본질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어깨에 늑대 가죽을 두르고 Shalipa(늑대 요가 수행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정신과 육체, 손실과 이득의 감정을 극복하고 9년 간 명상을 했다.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진실과 겉 모습의 본질에 대한 여러 가지 실천을 가르쳤다. 그는 겉모습과 공허함, 지혜와 숙련된 도구의 통합을 가르쳤다. 마침내, 그는 존경받는 사람이 되었다.
If ever there was an ancient portrait of the alienated modern (or postmodern) man, it is Shalipa as we first see him. He has societal problems, being poor, low caste and powerless; environmental problems, being forced to live beside a charnel ground in which wolves roam and howl; medical problems since he can neither eat nor sleep properly; psychological problems, a rampantly spreading wolf phobia; and spiritual problems, for he ways he is too upset to practice the dharma. We can readily understand and empathize with him when we first meet him, shivering in his hut and complaining to his visitor.
만일 여기에 소외된 현대인에 대한 묘사가 있다면, 처음에 보았던 shalipa일 것이다. 그는 가난이나, 낮은 계급, 무력함과 같은 사회적 문제가 있었고, 늑대가 돌아다니고 울부짖는 납골당 근처에 살게 되는 환경적 문제도 있었고 적절하게 먹지도, 잠들지도 못하게 된 이후로 의료 문제도 있었다.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퍼져가는 늑대 공포증과 같은 심리 문제, 계율을 실천하기에 너무나도 혼란스럽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종교적 문제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그의 집에서 부들부들 떨면서 방문자에게 불평을 늘어놓는 그를 처음 보고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But then the story shifts, becoming less readily available to the modern sensibility. Shalipa's mentor does not advise him to move away, to sue the owners of the charnel ground, to delve into the meaning of wolf howls in his personal history, or to endure his fate as a means of religious salvation. Rather he is instructed to use his own experience in meditation to undergo a radical transformation in how he senses, knows, and feels. He emerges with freedom from his problems and the power to act on and for others. What is this transformation in knowing feeling, acting, and relating and how it is achieved? What might this story have to tell us about how we view the world in our present psychology and how it may be alternatively viewed through the eyes of the meditative traditions?
그러나 이야기는 현대의 감성에는 즉시 적용되기 어렵게 바뀐다. shalipa의 멘토는 그에게 이사하라고, 납골당 땅의 주인들을 고소하라고, 늑대 울음소리의 의미를 개인사에서 찾으라거나 그의 운명을 종교적 구원의 수단으로 견디라고 조언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그의 경험을 감지하고, 알고, 느끼는 방식의 근본적 변화를 겪기 위한 명상에 이용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문제를 자유와 스스로와 타인을 위해 행동할 수 있는 힘으로 헤쳐 나온다. 이러한 인식하고, 느끼고, 행동하고, 관련짓는 방식의 변화는 무엇이며,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이 이야기가 현재 우리의 심리에서 세계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이며 명상적 전통의 눈을 통해서는 어떻게 보일까?
In this essay I will first delineate our present understanding or portrait of a human as it appears in the cognitive sciences and in folk psychology, arguing that this portrait precisely fits Shalipa's initial status and condition. Second, I will attempt to show that this portrait is not a modern anomaly but matches the description of samsara in ancient Buddhism (and other meditative traditions) and that it has a universal experiential basis which is discovered by self observing beginning meditators. (The material on mediators is based on observations, participations, conversations, and interviews with meditators from various groups.) Finally, I will seek to show how continued experiential examination in the meditative traditions reveals an alternative mode of knowing, feeling, acting, and being which offers a radically different human portrait. Might this latter mode of knowing provide a possible basis for a future (post post modern perhaps) science of psychology?
이 글에서 나는 우선 인지 과학과 민족 심리학에서 나타나는 인간에 대한 현재의 이해와 묘사를 설명하면서 이런 묘사가 정확히 Shalipa의 초기 신분과 상황과 일치한다는 것을 주장할 것이다. 두 번째로, 이러한 묘사는 현대의 변칙이 아니라 고대 불교(혹은 명상적 전통들에서의)의 윤회에 대한 설명과 일치하며 자아 성찰을 시작하는 명상가들에게 발견되는 보편적인 경험적 기초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시도할 것이다. (명상가들에게 물질은 관찰, 참여, 대화, 여러 집단의 명상가들과의 면담에 근거한다.) 마지막으로, 명상적 전통의 지속적인 경험적 조사가 어떻게 깨닫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존재하는 방식의 대안을 밝힐 수 있는지를 보일 것이다. 아마도 후자의 깨닫는 방식은 미래(아마도 현대의 아주 다음일) 심리 과학에 가능한 근거를 제공하지 않을까?
1.PORTRAIT OF THE MIND IN THE COGNITIVE SCIENCES 1.인지 과학에서 정신의 묘사
What is a human being? What is the human mind? when we hear such questions, what do we think? what images come to mind? Cultures, religions, and the various sciences offer differing portraits of the human being; these are crucially important to the ways in which we may then seek to study, help, instruct, regulate (or perhaps enjoy) those humans. Waht portrait of the human do we have that leads the scientist to feel that experience is not a proper approach to the study of minds, that the mind must be treated as thohugh it is an external object to be examined objectively according to the canons of natural science? What portrait of the human do we have that led to modernism and to its present breakdown as described elsewhere in this book? The information processing view of the mind held by present experimental psychology (and the cognitive sciences as a whole) may be our most concise formulation, a pinpointing, of the principles underlying such a portrait.
인류란 무엇인가? 인간의 정신이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들었을 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는가? 어떤 인상이 떠오르는가? 문화, 종교, 다양한 과학들은 인류에 대한 여러 가지 설명을 제시한다. 과학으로 하여금 경험은 마음의 연구에 적절한 접근법이 아니며, 마음을 자연 과학의 규범에 따라 객관적으로 조사되어야 할 외부 물질인 듯이 다루어져야 한다고 느끼게 하는 우리 인간의 모습은 무엇인가? 이 책의 다른 부분에서 설명된 것처럼 근대화와 현재의 몰락으로 우리를 이끈 인간의 모습은 무엇인가? 현대 실험 심리학에 의해(그리고 인지 과학 전체에서)행해지는 정신의 정보 처리 관점이 아마도 이러한 특성의 근본적 원리에 대한 가장 간결하고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Let us begin, therefore, with the model of the mind provided by the modern cognitive sciences. The mind is seen as an information processing system. Outside of the mind is an objective world, such as is studied by physics. Information from that world enters the mind through the sense organs where it proceeds through various stages of short term memory and is finally stored in long term memory. In this process the information is transformed into cognitive representations (re-representations) of the external world and of one's self in that world. One also develops causal theories about the world and one's self and habits of actions based on these. Information from the representations and theories in long term storage also go back to the sense organs so that one knows how to interpret and appraise (in accordance with one's expectations and goals) incoming stimuli, and it goes out along the motor pathways so that one can act.
그러므로, 현대 인지 과학에서 규정하는 마음의 모형부터 생각해보자. 마음은 정보 처리 장치같이 보인다. 정신의 외부는 물리학에서 연구되는 것 같은 실존하는 세계이다. 이 세계로부터의 정보는 단기 기억의 다양한 단계를 거치게 되는 감각 기관을 통하여 들어오고 마침내 장기기억으로 저장된다. 이 과정에서 정보는 외부 세계의 인지 표상과 그 세계 속의 자신으로 전환된다. 또한 이런 것을 기초로 행동 습관이나 세상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킨다. 표상으로부터의 정보와 장기 저장의 이론은 감각 기관으로 되돌아가서 (기대나 목표에 따라) 들어오는 자극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방법을 알 수 있으며, 운동 근육 신경 통로를 통해 빠져나가서 움직일 수 있다.
Now let's look at the implications of this portrait of the mind for the issues raised by the Shalipa story. For the sake of organization we can divide these implications into the three classical divisions of knowing (cognition), feeling (conation), and action, and add to it a fourth category, implications for relationships with other people.
이제, shalipa 이야기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위해 마음의 특성이 암시하는 것을 보도록 하자. 조직화하기 위하여 이런 의미들은 인지와 감각(의욕), 행동의 세 가지 기본적 구분과 여기에 타인과의 관계라는 의미의 네 번째 범주를 추가할 수 있다.
In terms of knowing, the information processor is inside of the information processing system and is separate from its objects. This separated knower constructs its cognitive representations out of bits of information that come its way, and it sees everything in terms of these representations. As to the feeling, appetitive, wanting part of the person: just as objects of knowledge are outside of the system, so are objects of desire, while the inependent, separeated wanter of objects is inside of the system. Perhaps the most clear cut rendition of this separated wanter appears in classical utility theory in economics. Inside the information processing system is a rational wanter who computes the utilities and probabilities possessed by external objects of desire and then acts rationally on the world to try to obtain these obhjects ... and then more objects and more objects. And what is action in the cognitive science mode of thinking?" It is based on rules How can someone catch a baseball? We can work out are rather elaborate set of rules of motion based on vectors and trajectories from physics and then attempt to program a robot to catch a baseball based on those rules. How can a person make a moral decision? Now we need an explicit set of moral rules and a program for weighting and combining them to make moral judgements.
인지의 측면에서 정보의 처리는 정보 처리 체계 내부에 있으며 물체로부터 분리되어있다. 이렇게 분리된 인지자는 제공된 작은 정보에서 벗어나서 인지 표상을 구성하며 이러한 모든 표상에 관하여 모든 것을 확인한다. 느낌과 식욕, 욕구 부분에 대하여: 독립적이며 분리된 욕망의 물체는 이 체계 내부에 존재하는 반면에, 지식과 갈망의 대상은 이 체제 외부에 존재한다. 아마도 분리된 욕망의 가장 명백한 해석은 고전 경제학의 효용이론에 드러날 것이다. 정보 처리 체계 내부에 존재하는 것은 외부의 갈망의 대상이 소유한 유용성과 개연성을 계산한 후에 그 대상과 더욱 더 많은 물체를 얻기 위해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이성적 요구자이다. 그러면 인지 과학적인 사고의 측면에서는 행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규칙에 달려있다. 야구공을 어떻게 잡을 수 있는가? 우리는 물리학에서의 벡터와 궤적에 근거하여 일련의 행동 규칙들을 보다 정교하게 시행할 수 있고 그런 규칙들을 기초로 로봇이 야구공을 잡도록 프로그램화 하려고 시도한다. 사람은 어떻게 도덕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가? 이제 우리는 도덕적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 도덕 규칙들에 가중치를 주고 그것들을 결합시키기 위한 프로그램과 명백한 도덕 규칙이 필요하다.
Finally how does the information processor so described relate to other people? In a certain sense, (s)he never does. Isolated inside the information processing system, all (s)he evere sees or knows or wants or can act from is his/her cognitive representations which are realted only indirectly (perhaps in the long run only by evolution) to anything or anyone in the autonomous outside world. Popular psychiatry says we have intimacy problems with other people. Of course! From this point of view, I do not actually see this had which is in front of eyes or feel this table I am touching, so we have intimacy problems with everything sensations, perceptions, thoughts, emotions, actions, much less with anything as global and awesome as another person.
최종적으로 정보 처리자는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설명 하는가? 어떤 의미에서는,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정보 처리 체계 내부에서 고립된 채로 그(녀)가 자신의 인지 표상에서 보거나 알거나 원하거나 행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자율적인 외부 세계의 어떤 것이나 누구와도 단지 간접적으로만 연관되어 있다. 유명 정신 의학은 우리가 타인과의 친구 관계에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물론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나는 내 눈 앞에 놓인 이 손을 실제로 보지 않고 만지고 있는 탁자를 느낄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모든 감각과 지각, 생각, 감정, 행동과 하물며 타인과 같이 전체적이며 놀라운 무언가에 대해서도 물론 친밀 관계에 문제가 있다.
This model of the human mind is not confined to the single discipline of academic psychology. A major theme of modern philosophy since Brentano and then Husserl has been how it is possible for mental states to be always about something other than and separate from themselves (see, for example, Dreyfus), an issue misleadingly called the problem of intentionality. In linguistics, it has generally been assumed since antiquity that language can only get its meaning by means of reference to independent objects and states of the world. Psychoanalysis, one might think, is sufficiently intimate and internal to be an exception to the model, but if we actually look at Freud, his system is a perfect portrait of cognitivism. The mind is made of mental representations which are about something external, even in the unconscious. Objects of desire are always outside: the id wants to grab them right away; the superego generates rules that say no; and the best that the beleaguered ego can do is make some compromises, while the person remains ever unsatisfied. On the more societal level, the popular social exchange theory in sociology, anthropology, social psychology, and economics view the psychological motives behind social interaction as the attempt of each individual to bring as many good things as possible within his/her boundaries while paying out as little as possible of hi/her scarce resources. It isn't just professionals who think in these ways; as surveys how, the (wo)man in the street largely agrees.
이러한 인간의 마음의 사례는 학리 심리학 단 한 분야에 국한되지 않는다. Brentano와 그 이후 Husserl 이래로 근대 철학의 주된 주제는 심리 상태가 어떻게 항상 다른 것들(예를 들어, 드레퓌스 같은)에 관할 수 있거나 그들로부터 독립될 수 있는 방법이었으며 이것은 고의성의 문제라고 잘못 불리게 되었다. 언어학에서는 고대부터 언어는 세계와 독립된 물체와 상태를 언급하는 도구로서만 그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추정되어왔다. 누군가는 정신 분석이 사례의 예외가 될 정도로 충분히 친밀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만일 우리가 Freud를 살펴본다면 그의 체계는 인지주의의 완벽한 묘사일 것이다. 생각은 심지어 무의식 속에서도 외부의 어떤 것에 관한 정신의 묘사로 이루어진다. 갈망하는 물체는 언제나 외부에 있다. 이드는 그것들을 즉시 사로잡기를 원한다. 초자아는 안 된다고 말하는 규칙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사면초가에 놓인 자아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타협안을 만드는 것이고, 개인은 언제나 불만족스러운 상태로 남는다. 더욱 사회적인 단계에서, 사회학, 인류학, 사회 심리학, 경제학에 있어 더욱 대중적인 사회적 교환 이론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넘어선 심리학적 동기들을 개인이 가능한 한 가장 적은 자원을 지부하는 반면에 그/ 그녀의 경계 내에서 가능한 한 가장 좋은 것들을 가지고 오기 위한 시도로 본다. 이러한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전문가들뿐만이 아니다. 조사에서처럼, 길거리의 남녀도 크게 공감한다.
Such an alienated portrait of the human has not gone unnoticed by thinkers in our culture, and it is popular to attribute it to some aspect or fault in modern civilization. In fact you may be saying to yourself right now, 'Ah-hah! That's Cartesianism! That's our modern western dualistic portrait of the mind, and that should be contrasted with all the rest of the world which doesn't see things that way.' Or you might think that such a model is the product of post-industrial-revolution alienation which is now spreading around the world but that it does not apply to peoples in pre-industrial or ancient times. Or that it is the reuslt of secularization, patriarchy, or any number of particular causes without which it did not or would not operate.
이러한 소외된 인간의 묘사는 우리 문화의 사상가들에게 간과되지 않았으며 현대 문명화의 일면 혹은 결함에 대한 책임이 이것에 있다고 여겨진다. 사실 당신은 자신에게 당장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아하, 이것이 데카르트 주의다! 이것은 우리 현대 서양의 이원론적 정신의 묘사이며 이런 식으로 사물을 보지 않는 세상의 모든 것들과는 대조되어야 해.’ 혹은 아마도 이러한 견본이 현재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지만 산업사회 이전이나 고대의 사람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던 산업 혁명 이후 소외감의 산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세속화, 가부장제, 혹은 수많은 특별한 이유들의 결과라고 생각할 것이다.
But what about Shalipa as we originally meet him? Here is a pre-Cartesian, pre-industrial revolution, pre-secularization, nonwestern man as alienated from his world and his feelings as ever you might wish. We have no trouble at all understanding and identifying with his state of mind as he sits huddled in his hut, terrified of the howling wolves; our difficulties or questions have to do with what happens to him after that when his understanding and experience start to change.
그러나 Shalipa는 어떠한가? 항상 여러분이 원했던 것처럼 자신의 감정과 세계로부터 격리된 데카르트 주의 이전의, 산업 혁명 이전의, 세속화 이전의, 서양인이 아닌 한 남자가 있다. 우리는 오두막 안에서 늑대 울음소리에 겁에 질려 움츠려서 앉아 있는 그의 심리 상태를 공감하며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우리의 어려움이나 질문들은 그의 이해와 경험이 변하기 시작한 순간에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이다.
I wish to argue that the dualistic and alienated understanding of a human being which prevails today in the social and cognitive sciences is not a historical or social accident; rather, it is a representation of a deep and universal aspect of folk psychology, an aspect which in the Buddhist (and to some extent Hindu) traditions is called samsara. Samsara is where humans will, it is said, discover themselves to be as, though training in meditation, they become mindful, instead of mindless, of their mental processes and actions in everyday life.
나는 오늘날 사회, 인지 과학에 만연한 인간에 대한 소외된, 이원론적 이해는 역사적 사건 혹은 사회적 사건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보다, 이것은 민속 심리학의 깊고 보편적인 일면의 묘사이며, 이 일면은 불교도 전통에서 samsara(그리고 몇몇 힌두교도에게)라고 불린다. Samsara는 말하자면, 인간이 명상 속에서 수련을 통해 일상 속에서 자신의 정신 작용과 활동을 염두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곳이다.
So let us turn now to the issue of meditation, of experience, and of experimental method. Western scientific psychology explicitly seeks to study mind from the outside as though it were an object of the natural sciences. The meditative traditions provide an alternative route, methodologies for learning about the mind/consciousness/living being from the inside, paths for gaining knowledge about the living being as that being itself.
그러므로 이제 명상과 경험, 경험적 방법의 문제로 넘어가도록 하자. 서양의 과학적 심리학은 이것이 자연 과학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외부에서 정신을 연구하고자 한다. 명상의 전통은 정신/의식/내부로부터의 삶을 배우는 방법론이라는 대안과 그 자신으로서의 삶에 관한 지식을 얻는 길을 제공한다.
((미완성))